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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문(안토니오)순교자 성지순례 (모든성인의 모후 Pr.)

2013.09.06 05:46

우효균 스테파노 조회 수:518





















||0||0http://pds45.cafe.daum.net:80/attach/13/cafe/2007/09/30/16/30/46ff5087da398&filename=05[1].TheScentsofJoy.WMA정찬문(鄭燦文)안토니오 순교자(1822~1866)

정찬문(안토니오)순교자는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 중촌마을에서 양반의 자녀로 태어났다.
순교자는 고려 말 대사헌을 지낸 정온의 후손이었다. 정온은 조선이 건국되자 절개를 지키려 낙향했던 인물이다.
순교자는 대산면 가등공소 신자 칠원 윤씨와 혼인 하였는데 부인의 권면으로 영세 입교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는 신자인 것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놀란 문중에서는 천주교인이 아니니 다시 조사해
달라는 재심을 청하는 한편 순교자를 회유하려 하였다. 양반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던 정씨 집안에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교인이 나타났으니 문중의 박해는 가혹할 수 밖에 없었다. 갖은 압박과 질책이 가해졌지만 순교자는 배교를
거부했다. 다시 감옥으로 끌려간 순교자는 혹독한 심문을 거듭 받던중 매를 너무 맞아 1866년 12월 20일(음)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나이 45세였다.

친척들이 시신을 요청하자 관에서는 머리를 남겨두고 몸만 내어주었다. 순교자가 양반가문 사람이고 재심을 청구한
문제의 죄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하체만 장사 지냈고 이곳 사람들과 신자들에게 무두묘(無頭墓)로
알려지게 되었다.

순교자의 무덤은 서정도신부와 교우들의 노력과 무촌리 중촌에서 나고 출가해 같은 마을에서 줄곧 살아온 당시
85세의 광산 김씨 텃골할머니의 제보로 1948년 3월 29일 확인되었다. 순교자의 묘소는 허유고개 비탈길가에 있었는데
아무도 무덤인줄 모를 정도로 봉분이 허물어져 있었다. 교우들(주로 청년들)이 무덤을 열었을 때 구덩이를 깊이
파지 않고 매장한 흔적이 완연했다. 보고를 받은 서정도신부는 그해 5월 31일 교우들과 순교자의 외인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덤을 다시 열고 유해를 새로 입관하였다. 그리고 순교자의 묘소를 약간 위쪽으로 이장하였고
본당에서 준비한 비석을 세웠다.

그 후 진주 옥봉본당 주임 정삼규(요한)신부는 옥봉, 문산, 칠암, 사천 본당을 중심으로 "정안또니오 순교자 현양위원회"
(회장 김영도)를 구성하고 이 곳 부지 754평을 확보하고 1975년 10월 순교자를 이곳으로 모셨다.

정 안당 - 진주 동면 허유고개 중촌사는 양반이라
             병인(丙寅) 가을에 전주포교에게 잡혀 혹독한 형벌 아래서 죽으니
             나이는 40여세려라                             ------- 치명일기  1895년 기록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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